생전에 남긴 사진 글 메시지 좋아요 이력은 클라우드와 SNS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고 종종 죽음 이후에도 업데이트되거나 노출됩니다.
과거에는 유품이나 사진첩이 유산이었다면 이제는 페이스북 계정이나 구글 드라이브도 유산이 됩니다.
그렇다면 디지털 상의 삶의 흔적은 누구의 소유이며 어떻게 처리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질문이 생깁니다.
1. 사망 이후 플랫폼 계정의 운명
많은 사람이 SNS와 이메일 클라우드 서비스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만 정작 사망 이후 이들 계정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현재 주요 플랫폼들은 각자의 기준에 따라 사망자의 계정을 처리하고 있으며 관련 제도도 조금씩 진화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페이스북입니다. 페이스북은 사용자가 생전에 직접 설정할 수 있도록 기념 계정 지정자 기능을 제공합니다.
이 기능을 통해 사망자의 계정은 삭제되지 않고 기념 계정으로 전환되어 남겨진 사람들이 고인을 추모할 수 있도록 유지됩니다.
기념 계정이 되면 이름 옆에 기억하기라는 문구가 표시되며
타임라인에 글을 남길 수는 있지만 새로운 친구 추가나 광고 타깃 등은 중단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생전에 미리 지정해놓지 않으면 유족이 직접 요청을 해야 하며 인증 절차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구글은 사망자 계정을 처리하기 위해 휴면 계정 관리자 기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용자가 일정 기간 동안 활동이 없으면 사전에 지정한 사람에게 이메일 권한이나 드라이브 파일 접근권을 넘길 수 있게 하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사전에 설정이 되어 있지 않다면 유족은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계정 접근이 가능합니다.
이외에도 인스타그램은 유족이 사망 증명서 등을 제출하면 계정을 기념 계정으로 전환해 주지만
대부분의 SNS나 클라우드 서비스는 명확한 사망 처리 정책을 공개하지 않거나
사용자가 자발적으로 설정하지 않으면 아무런 조치 없이 방치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차이점은 결국 고인의 디지털 흔적이 어떻게 관리되는지를 플랫폼에 맡기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2. 데이터 접근에 얽힌 법적 문제
디지털 유산을 둘러싼 가장 복잡한 문제는 소유권과 사생활 보호입니다.
사망 이후 남겨진 디지털 기록은 단순한 정보 그 이상으로 고인의 인격적 흔적이며 동시에 유족에게는 추억의 자료가 됩니다.
그러나 이 데이터를 누가 열람할 수 있고 누가 삭제할 수 있는지는 국가마다 다르고 플랫폼마다 규정이 다릅니다.
독일에서는 2018년 연방헌법재판소가 한 사건에서 부모가 사망한 자녀의 페이스북 메시지를 열람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바 있습니다.
부모가 딸의 사망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페이스북 계정 접근을 요청했지만 플랫폼 측은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거부했고
결국 법원이 유족의 권리를 인정한 것입니다.
이 판결은 사망자의 디지털 기록이 유족의 상속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반면 미국에서는 유족이 사망자의 이메일이나 소셜미디어 계정에 접근하려 할 때
종종 개인정보보호법이나 통신비밀보호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거부되는 일이 많습니다.
특히 구글이나 애플과 같은 글로벌 기업은 유족의 요청이라 하더라도 법원 명령 없이는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에서도 아직 명확한 법적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대부분의 경우 개별 플랫폼의 규정에 따라 처리되고 있습니다.
디지털 유산에 대한 법적 해석이 미비하다 보니
유족이 고인의 계정을 삭제하거나 유지하는 데 있어 큰 불편을 겪는 사례가 자주 보고되고 있습니다.
3. 디지털 유산 관리의 새로운 흐름
이러한 문제의식이 확산되면서 디지털 유산을 전문적으로 관리해주는 서비스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일부 보험사나 스타트업은 생전에 고객이 디지털 유산 처리 방식을 미리 설정해두면
사망 시점에 해당 계정을 자동으로 삭제하거나 특정 사람에게 이관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GoodTrust나 Cake 같은 서비스는
사망 이후의 디지털 자산을 포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또한 일부 국가는 입법을 통해 디지털 유산 상속권을 제도화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습니다.
유럽연합은 GDPR 내에서 사망자의 데이터 보호 문제를 논의 중이며
일본이나 캐나다 등은 특정 조건하에 유족의 계정 접근을 허용하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은 디지털 유산이 더 이상 개인의 프라이버시만이 아니라 사회적 자산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앞으로의 시대에는 유언장에 디지털 계정의 처리 방식까지 포함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일부 국가에서는 유언장 작성 시 이메일 계정 비밀번호나 클라우드 접근 권한도 함께 남기는 사례가 늘고 있으며
사후에 계정을 삭제할지 유지할지 선택지를 명확히 기록하는 문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디지털 계정 정리 서비스나 사전 설정 기능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생전에 내가 사용했던 SNS나 사진 저장소가 죽은 뒤에도 계속 열려 있는 상황은 당사자에게도 유족에게도 큰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데이터 삭제 여부나 관리 권한 이양 등을 미리 지정하는 것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자기결정권으로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사망 이후에도 남는 디지털 흔적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기억이며 감정의 저장소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며 남기는 모든 기록은 결국 유산이 됩니다.
아직은 혼란스럽고 규정되지 않은 영역이 많지만 기술이 인간의 죽음조차 다루게 된 이 시점에서
디지털 유산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제도 정비가 필요합니다.
생전의 삶만큼 사후의 흔적도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